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나는 내 랜턴을 던져버렸고, 이제 어둠을 볼 수 있다.
- 웬델 베리, 오래된 언덕
🔖이 책은 다시 장소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의 훌륭 한 사례로 생태지역주의(bioregionalism)를 제시한다. 환경운동가 피터 버그가 1970년대에 처음 개념을 설명했으며 원주민의 토지 관행에서 널리 나타 나는 생태지역주의는 각 장소에 뿌리내린 여러 삶의 형태뿐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인식한다. 생태지역주의적 사고는 서식지 복원과 지속 가능한 농업 등의 실천을 아우른다. 여기에는 문화적 요소도 있는데, 스스로를 국가만큼 이나 중요한 생태지역의 시민으로 여길 것을 요구하 기 때문이다. 생태지역에서 우리의 ‘시민의식’은 단지 그 지역의 생태에 친숙한 것을 넘어서 함께 생태를 헌신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관심경제에 대한 비판과 생태지역 인식의 가능성을 연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적 사고, 외로움, 환경에 대한 폭력적 태도가 전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경제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과 관심경제가 우리의 관심에 미치는 영향이 유사하다는 데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공격적인 단일 문화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문화에서는 ‘쓸모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벌목꾼이나 페이스북이) 활용할 수 없는 요소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이러한 쓸모의 관점은 삶을 원자화, 최적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를 모든 요소가 있어야 제 기능을 하는 살아 있는 전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벌목과 대규모 농업 같은 관행이 땅을 초토화하듯이, 성과에 집착하는 분위기는 한때 개인과 집단의 생각이 풍성하게 자라던 풍경을 더이상 아무것도 자랄 수 없을 때까지 천천히 땅을 파괴하는 몬산토 농장으로 바꾸어놓는다. 생각의 종류가 하나씩 멸종할수록 관심의 토양도 점점 더 침식된다.
현대적 생산성 개념이 결국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생산성을 파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장자의 쓸모없는 나무 이야기 속 모순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장자의 이야기는 다른 무엇보다 ‘쓸모’를 규정짓는 개념의 편협성을 비꼬는 농담이다. 나무는 목수의 꿈에 나타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위한 쓸모인가? 이 질문은 내가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곱씹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무엇을 낳는 생산성인가? 어떤 방식의, 누구를 위한 성공인가? 내가 삶에서 가장 큰 행복과 충족감을 느낀 때는 모든 필멸의 존재에 따르는 희망과 고통, 슬픔과 더불어 살아 있음을 온전히 인식한 순간이었다. 이러한 순간에 목적론적 목표로서의 성공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순간들은 그 자체로 중요했고, 어딘가로 향하는 사다리의 계단이 아니었다. 나는 장자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 느낌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쓸모없는 나무 이야기 초반에는 중요한 정보가 나온다. 여러 판본에서 언급하길, 이 뒤틀린 나무가 뻗은 가지는 어마어마하게 폭이 넓어서 수천 마리의 소와 말들에게 그늘을 제공할 수 있었다. 쓸모없는 나무의 형태는 목수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만 유용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돌봄의 형태이기도 했다. 쉴 곳을 찾는 수천 마리 동물들 위로 가지를 뻗음으로써 다른 생명체를 돌보고 그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지가 빽빽하게 얽혀 새와 뱀, 도마뱀, 다람쥐, 곤 충, 버섯, 이끼에게 안전한 서식지를 제공하는 쓸모 없는 나무들이 즐비한 숲을 상상한다. 어느 날 쓸모만을 따지는 땅에서 온 지친 여행자가 이 너그럽고 시원하며 쓸모없는 환경에 도착할지 모른다. 그는 땅에 짐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채 잠시 돌아다니다 동물들을 따라서 나무 아래 자리를 잡는 다. 그리고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콤한 낮잠을 잘 것이다.
🔖 이처럼 어떤 대상에 거의 마비에 가까울 만큼 매료되는 현상에 나는 ‘관찰의 에로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통조림공장 골목』 도입부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스타인벡은 표본을 자세히 관찰할 때 필요한 인내심과 세심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해양 동물을 수집하다 보면 어떤 편형동물은 워낙 연약해서 건드리면 부서지고 찢어지는 까닭에 온전한 형태로 붙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그 동물들이 자기 의지로 흘러나와 칼날 위로 기어오르게 해야 한다. 그다음에 살짝 들어 올려 해수가 든 병에 집어넣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을 쓰는 방식도 그와 같을지 모른 다. 페이지를 펼쳐 이야기들이 스스로 기어오르게 하는 것.
🔖 관심을 붙드는 구조의 미로 같은 특성과 듣기 위 해 멈춰서는 순간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이 각 각의 순간이 고유한 방식으로 일종의 중단을, 익숙한 영역에서의 퇴거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뜻밖의 비밀 통로를 헤맬 때 선형적인 시간에서 이탈한 느낌을 받듯이, 나 또한 흔치 않은 새를 보거나 새소리를 들을 때면 시간이 멈춘 듯하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곤 한다. 이러한 장소와 순간은 진정한 휴식을 선사하며,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긴 휴식과 마찬가지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는다.
🔖 노동자에게 경제적 안정이 사라지자 여덟 시간의 노동, 여덟 시간의 휴식, 여덟 시간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경계가 무너졌고, 우리에게는 시간대나 수면 주기와 상관없이 언제나 현금화할 수 있는 24시간만이 남았다. 깨어 있는 내내 생계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여가 시간까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숫자로 수치화된다. 재고를 확인하듯 수시로 자 신의성과를 확인하고 퍼스널브랜드의 발전 과정을 감시할 때, 시간은 경제적 자원이 된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에 쓰는 시간을 정당화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투자 대비 수익이 전혀 없다.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 간의 잔인한 교차점이다. 비영리 공간이 사라지듯이 우리도 자신의 모든 시간과 행동을 잠재적 돈벌이 수단으로 여긴다. 공공장소가 공공인 척하는 소매점이나 기업이 민영화한 수상한 공원에 자리를 내어주듯이 우리도 손상된 여가 개념을 주입받는다. 이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유료 여가’다.
🔖 이런 사람들에게 나는 훨씬 검소하게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공손히 제안한다. 그 방법은 짧은 한순 간이 무한하게 펼쳐질 수 있도록, 무언가를 생산하는 시간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존 뮤어의 말 처럼 “가장 긴 삶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움을 가장 많이 느낀 삶이다”.
물론 이러한 해결책은 돈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고 혁신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장미 정원의 우묵한 자리에 앉아 인간과 비인간의 다양한 신체에 둘러싸여 나의 것을 비롯한 수많은 신체적 민감성이 뒤섞인 현실에 머무는 긴 시간 동안(실제로 재스민과 적당히 잘 익은 블랙베리의 향기가 내 신체의 경계를 침범한다), 나는 내 휴대폰을 내려다 보며 이것은 어쩌면 감각 박탈의 공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환하게 빛나는 자그마한 성과 지표의 세계는 산들바람, 빛과 그림자, 통제할 수 없고 형언할 수도 없는 구체적 현실로 내게 말을 거는 내 눈앞의 세계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 하이브리드적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는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색하는 것과 참여하는 것, 떠나는 것과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언제나 다 시 돌아오는 것. 「행동하는 세계에서의 사색』에서 머튼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 두 가지 움직임을 동시에 실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나는 그 가능성을 따라 도피나 망명의 언어 대신 다른 것을 제시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한 발짝 떨어지기’라고 명명한 단순한 분리 상태다.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외부자의 관점을 갖는 것,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도 떠 나갔을 곳을 흔들림 없이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적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적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 적은 이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이 세계를 접하는 채널이다. 이는 또한 미디어의 사이클과 서사가 허락하지 않는 중요한 휴식을 자신에게 제공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우주에 호소하는 자유의지론자의 빈 서판이나 역사와 단절되고자 했던 코뮌과 달리, 이 ‘다른 세상’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함께 정의를 실현한 이 세상의 완벽한 이상향에 가깝다.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은 여기에 수반되는 모든 희망과 슬픈 사색을 품고 현재의 세계를 미래에 가능한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현재에 책임을 느낌으로써 우리는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하는 좋은 삶의 희미한 윤곽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삶은 신화와 미신, 즉 인종차별과 성차별,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 외국인 혐오, 기후변화 부정, 그 밖에 현실에 기반이 없는 다른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삶이다.
이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관심경제는 우리를 참담한 현실에 계속 붙잡아두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고충이 과거에 어떤 형태였는지 인식하는 것뿐 아니라, 어떻게든 실망하거나 타격받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 관심경제에서 시민 불복종은 곧 관심을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페이스북을 요란하게 탈퇴하고, 그 사실을 트위터에 올리는 것은 상상 속의 섬 페라를 보트를 타고 갈 수 있는 실제 섬으로 간주하는 실 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진정한 관심의 철회는 다른 무엇보다 마음에 달렸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완벽한' 중단이 아니라 지속적인 훈련이다. 우리에게는 관심을 거두는 능력뿐 아니라 다른 곳에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 관심을 확대하고 증식하는 능력, 관심을 더욱 예리하게 갈고닦는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미디어 지형이 24시간(또는 그보다 더 짧은 시간)을 주기로 사고하게 할 때 다른 시간 단위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고, 낚시 기사가 클릭을 유도할 때 잠시 멈춰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페이스북 피드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비난을 쏟아낼 때 그 맥락을 살핌으로써 인기를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미디어와 광고가 우리 감정을 이용하는 방식을 면밀히 연구하고, 미디어가 조종하는 알고리즘 버전의 자기 모습을 이해하며, 우리가 언제 죄책감과 위협을 느끼고 가스라이팅을 당하는지, 의지와 반성이 아닌 두려움과 불안에서 나온 반응을 보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대규모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탈퇴하는 것보다 대규모로 관심을 이동하는 데 더 큰 관심이 있 다. 사람들이 자기 관심의 통제권을 되찾고 모두 함께 그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관심경제에서 ‘제3의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것처럼 개인의 관심이 집단적 관심의 토대가 되고, 나아가 모든 종류의 유의미한 거부 행위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학생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전속력으로 앞으로 나아 갈 뿐 거부에 나서지 못하는 이 시기에, 관심이야말로 우리가 철회할 수 있는 마지막 자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윤만 좇는 플랫폼과 전반적인 경제적 불안정이 관심의 장소를 없애는 악순환에서 (바로 그 관심으로 이 맹공격에 저항해야 하지만 이 공격으로 우리의 관심은 더욱더 밀려난다), 우리가 그 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공간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뿐일지 모른다.
🔖 좋은 음악은 ‘나에게 몰래 다가와’ 나를 변화시키는 음악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킬 만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둘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힘들의 집합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 있다. 여기서 뜻밖에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을 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나를 통해 내가 모르는 무언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안정적이고 뚜렷한 자아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이를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자적 자아 개념을 버린 뒤 이러한 내려놓음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와 달리 무언가를 향해 ‘곧장 나아가는’, 기술적 으로 훌륭한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하는 것과 그 이 유에 대해 늘 안정적인 답안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나를 점점 파묻어버리는 것 같다. 사업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광고와 퍼스널브랜드의 언어가 ‘너 자신이 되라’고 요구할 때, 그 속에는 '더더욱 너 자신이 되어라'는 진짜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 ‘너 자신’은 습관과 욕망, 동기로 이루어진 일관적이고 인식 가능한 패턴이며, 이러한 패턴은 더 쉽게 광고의 타깃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사실 나는 퍼스널브랜드가 애매모호함이나 모순의 여지 없이 ‘나 이거 좋아, 나 이거 싫어’라고 결론 내리는 성급한 판단에서 나온 확실하고 변함없는 패턴이 아니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더 구체적인 버전의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면, 소로가 「시민 불복종의 의무」 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로 묘사한 것이 떠오른다. 만약 나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내가 전부 안다면, 그것들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도 전부 안다면(이 모든 것이 미래로 끝없이 이어져, 나의 정체성이나 내가 나라고 지칭하는 것의 경계가 그 어떤 위협도 받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계속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말할 것 이다. 만약 우리가 책을 읽는데 갈수록 내용이 앞과 비슷해져서 결국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게 된다 면 아마 그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이 내용을 낯선 이들의 영역으로 확대해보자. 우리가 현실의 교류를 이미 규정지어놓은 나의 정체성 안에서만 이어간다면 놀라거나 도전받거나 변화할 수 있는 계기도 사라질 것이다. 또한 본인이 가진 특권을 포함한 자기 자신의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공통점이 많은 사람에게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작은 파편 바깥으로 관심을 확장하지 않으면 상대의 가치나 나와의 관계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나-그것’의 세계에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를 뒤집어엎고 나의 우주를 새로 구축할 사람, 나를 크게 변화시킬 사람과 만날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
(…)
자신을 독립적이고 방어 가능하며 효율적인 무엇으로 여기는 마음이 특히 비극적인 이유는 그러한 마음이 매우 지겨운(그리고 지겨워하는) 사람을 낳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타인을 포함한 이 세상과 분리된 존재라는 생각이 완벽한 착오이기 때문에 이 마음은 더욱 비극적이다. 물론 이것은 안정감과 차별성을 갈구하는 매우 인간적인 갈망의 당연한 결과 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 욕망이 아이러니하게도 변화에 대한 두려움, 시간과 가치를 평가하는 자본주의적 개념,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 같은, 상상 속 자아의 안팎에 있는 여러 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리고 이 욕망은 통제 욕구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아가 온전히 타인에게 달 려 있으며, 나의 본질이 아닌 타인과 나의 관계로 결정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정체성 개념과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존재 개념(젠트리피케이션에 수반되는 믿음)까지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과의 교류에서 나오는 유동적 산물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느냐 마느냐다.
통제권을 잃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거짓된 자아의 경계 개념을 포기하는 것은 개념상은 물론이고 현상학적으로도 타당하다. 자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조금만 깊이 생각해봐도 자아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앨런 와츠는 자아라는 감각을 환각으로, “피부라는 포대 속의 자아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전적으로 그릇된 신념”이라 고 정의했다. 한편 이러한 경계를 넘어서는 방법을 배우면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환각 전문가와 함께 하는 모험」 이라는 글에서 마이클 폴런은 노련한 안내자와 함께 아야와스카를 체험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안도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어느 순간 폴런의 전통적 자아가 해체된다. "나는 포스트잇보다 작은 종이들의 뭉치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그 이후 폴런의 ‘나’는 다시 한번 변한다. "한때 나였던 것, 한때 내가 나라고 믿었던 모든 것, 60년간 이어져온 자아가 액화해 눈앞의 광경 사이로 흩어졌다. '여기’서 언제나 사고 하고 느끼고 인식하던 것이 이제는 '저기'에 있었다. 나는 마치 끈적한 물감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끈적한 물감'을 인식하는 자아는 누구인가? 폴런은 의식에 자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두려움이 아닌 안도감이었다는 것이다.
🔖 나는 활동가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찾지 못한 것, 결국 잡지 같은 느린 미디어나 물리적 모임에서 찾은 바로 그것이 해나 아렌트가 말한 ‘현상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에게 현상의 공간은 민주주의의 씨앗이었고, 함께 유의미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의되었다. 현상의 공간은 비록 깨지기는 쉽지만 근접성이나 규모 같은 조건들만 충족되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권력은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행위할 때 발생하는 공동의 힘이라고 정의한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권 력이 나타나는 데 있어서 유일한 필수 조건은 사람들의 공생이다. 인간이 서로 가까이 살아서 행동의 가능성이 늘 있는 곳에서만 인간은 권력을 가질 수 있다.”
🔖 내가 주장한 것처럼 특정 종류의 생각을 하는 데 특정 종류의 공간이 필요하다면, ‘맥락 수거’를 위해서는 온라인의 맥락 붕괴를 막는 데서 나아가 공공장소와 열린 공간, 더 나아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문화와 공동체에 중요한 모임 장소까지 지켜야 할 것이다. 인류세라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 나는 이 시기를 지칭하는 도나 J. 해러웨이의 용어가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해러웨이는 이 시기를 툴루세(Chthulucene)라고 칭하는데, 지구가 인간과 비인간 난민으로 가득하지만 피난처는 없는 시기를 뜻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해러웨이는 “툴루세를 살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될 생명으로서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모두와 협력해 피난처를 복원하고, 불완전하지만 굳건한 생물학적·문화적·정치적·기술적 회복과 재구성을 이뤄내 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한 애도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를 염두에 두면 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성의 논리가 멸종 위기에 처한 삶과 아이디어를 위협하는 이 시기에, 전통적인 의미의 서식지 복원과 인간의 사고를 위한 서식지 복원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